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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번 2. 궁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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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5번진짜안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5건 조회 9,296회 작성일 06-09-06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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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끝나버렸고 9월이 왔다.

런던에서 8월이 끝나가던 어느 오후, 죽어라 안 오는 15번 버스를 거의 40분 가까이 기다리면서 피카딜리 서커스에 서 있었다. 그것은 내 궁극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음흉한 음모 같았다.

40분 뒤에 온 버스 안에는 40분 어치의 인간들과 그 인간들의 기다림의 모멸과 그 인간들이 내뿜는 짜증들이 한 바께스였다.

덕택에 빈자리라곤 궁뎅이가 쌀 두가마니만한 여자 옆자리 하나 밖에 없었고, 나는 의자의 edge만 차지한 채 대단히 불편한 자세로 어쩌자고 이 여자는 궁뎅이가 이렇게 큰 거야, 라는 불만을 500만 번 쯤 궁시렁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내 처지가 우습고 한심했다. 튜브타고 집에 가면 불과 30분이면 집 현관문을 따고 있을 텐데

죽어라고 시간을 내동댕이 치며 기다려서 버스를 타고도
한 시간 가까이 궁뎅이 큰 여자 옆에 엉덩이 한 쪽의 반만 간신히 걸치고 앉아있어야 한다니 우습지 않은가.

문득 이게 무슨 제대로 궁상맞은 짓이지? 싶었다.

하지만 LT카드 기간이 끝나 버려서 튜브 끊으면 19.60파운드, 버스 끊으면 8.50파운드니까 튜브와 버스는 11파운드 차이였다.

일주일에 11파운드라면 정말 큰 돈이기는 하다.
누구라도 매주 길에서 1파운드짜리 동전을 11개씩 줍지 않는 한 선뜻 튜브를 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단돈 2만원 남짓 때문에 이런 식으로 궁상떨면서 살지는 않았었다. 그 정도 돈이라면 친구와 만나서 술 한 잔 간단하게(아주 간단하게) 마시면 끝나는 돈 아닌가.

여기서야 1주일 치 식량을 사 놓을 수 있는 돈이지만 사실상 그렇게 큰 돈 낭비는 아니다.

그런 돈 때문에 버스 속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시간을 버려가며 인생을 허비해야하는가 싶었다. 그래서 대체 어디까지가 궁상이고 어디까지가 절약인지를 생각해보았다.

절약과 궁상은 분명히 구분되어야한다.
절약정신은 누가 뭐래도 좋은 것이다. 아끼면 잘 산다. 그러나 궁상을 떠는 건 그다지 좋지 않다.

아끼다가 똥 되는 건 물론, 인생의 향방에 궁상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시종일관 암울해질 수도 있다.

절약과 궁상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 나는 쉽고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다.

미학이다. 아름다운가 아닌가로 따져보면 딱 구분된다.

누군가가 돈을 몹시 아끼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면 절약이고 추접의 극단을 달리면 궁상이다.
칸트 씨를 붙잡고 미적 판단을 내려 달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미적인 취미에 의한 주관적인 보편타당성의 쾌가 느껴지면 절약, 아니면 궁상.

자, 그래서 나는 그 순간 막돼먹은 15번 버스와 무자비한 엉덩이에 시달리고 있는 나 자신이 궁상인가 아닌가를 따져 보았다. 그것은 생각을 오래 할 필요도 없이 분명히 궁상 떠는 짓이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 자신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래서야 지쳐서 집에 가서 공부도 하기 싫어지는 것이다.
지금도 지쳐서 하소연 한답시고 이런 글 쓰느라 공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튜브타고 왔으면 벌써 한 시간 전에 집에 와서 깔끔하게 씻고 지금 쯤 공부하고 있을 텐데 말이지.

하나 더, 장보기를 예로 들어 보겠다.
마트에 소시지를 사러갔다. 개당 20P하는 소시지가 있었다 치자. 싸니까 아싸 싸다^^ 하고 사면 사면
십중팔구 못 먹는 것이다.
그냥 20P를 날리는 것이다. 그것은 궁상이다.

유통기한 하루 남은 싼 식빵 사서 두 쪽 먹고 버리는 일 같은 것이다.
먹을 수 있는 것 중에 1파운드 짜리와 80P 짜리가 있다면 80P 짜리를 먹는게 절약이다.

자 또 마트에 화장지를 사러 갔다. 이쪽 마트에선 95P인데 한 30분쯤 걸어가야 하는 마트에선 45P다. 물론 물건에 차이가 있다. 95P짜리는 똥꼬에 상처가 안나지만 45P 짜리는 조심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똥꼬에 기스가 간다.

게다가 30분을 걸어서 간다는 시간낭비를 고려할 때 그까지 가서 싸다고 45P짜리 화장지를 사서 똥고를 긁혀대는 건 절약이 아니라 궁상이다.

집에 와서 15번에 대해 왕짜증을 부려대며 아끼던 비빔면을 끓여 먹었다. RadioHead의 음악을 들으며 비빔면을 찬물에 헹구고 매콤하게 비벼서 오이까지 썰어서 얹어 먹고 나자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나 다음순간 기분이 다시 나빠졌다.

그 때 담배가 떨어져서 말아 피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비빔면 먹고 쇼파에 깊숙히 기대서 폼나게 담배 한 대 맛나게 빨려고 했더니 쇼파에 담배가루 막 떨어지고, 잘 말리지도 않고 불 붙이는데 홀라당 중간까지 타 버려서 기분을 잡친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아직 경지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너무나 자신이 궁상스러웠다.

내 룸메였던 남자는 담배를 진짜 잘 말았다, 너무나 깔끔하게 잘 말아서 피우기 때문에 그가 담배를 말고 있으면 궁상스럽지 않고 절약정신만 느껴졌었는데 나처럼 아름답지 못하면 이렇게, 궁상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항상 돈이 한정되어 있다는 게 문제이다. 시간이 많이 생기는 대신 버스를 타고, 돈 버느라 시간이 없는 대신 튜브를 타면 이거야 원, 무슨 차이가 있나. 아, 어려운 문제다.

자 어쨌거나 절약과 궁상의 차이에 대한 ‘아름다움’이란 구분법도 할 수없이 주관적인 것, 즉 생각하기 나름일 수밖에 없고

UN이나 NASA는 물론 한국 대사관에서도 여기까지는 궁상, 여기부터는 절약 이라고 구분한 지침을 발표하지 않고 있으니 각자 알아서 기준을 정해서 영국생활을 멋지게 하기를 바란다.

궁상 떠는 만큼 인생이 갈수록 궁상스러워진다. 깔끔 떨고 살면 인생이 갈수록 깔끔해진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 가치관이다.

낭비하고 살면, 훗날 뼛골이 낭비될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 어떤 것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알쏭달쏭한 말로 마무리 지으려는 이 글, 아 궁상맞어라.

요건 평소에 궁상 잘 떠는 아저씨 웃긴 동영상.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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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JJICJJA님의 댓글

no_profile JJICJJA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미스터 빈 정말 오랫만에 보네요. 영국가는 대한항공 비행기에선 항상 틀어줬었는데.. 그리고 궁상에 대하여 정말 공감. 제일 싼곳 열나게 찾아서 사더라도 그게 과연 싸게 산 것인지.. 제일 싼곳을 찾느라 들인 시간과 노력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런던신참님의 댓글

런던신참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영국에 온지 얼마 않돼서 물건 살때마다 뭔가 찝찝한 뭔가가 있었는데, 님의 글을 읽고 나니 공감도 가고 너무 재미있습니다.. ^^:; 한국에 있을 때는 공감가지 않았을 거예요.. 비빔면 맛있겠당.. ㅜㅜ 매일 똑같은 메뉴만 먹구 있어요.. 저는

25님의 댓글

25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그래서 지하철 타면서도 차라리 밥을 안사먹지가 저의 절약 신조에요.
궁상아니라고..당당히 -작게- 말할수 있는.

J님의 댓글

J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영국에서 살면 살수록 '궁상' 자체가 생활화 되버려서,
이게 궁상인지 뭔지조차 모르게 되네요.
인간이란 참.. 편리하고도 간사한 것이어요-
글이 맛있어서, 읽는동안 즐거웠어요~ ^-^

꺄소님의 댓글

꺄소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여기 와서 살면...다 같은 고민을 안게 되는군요. 공감합니다. 비빔면....맜있으셨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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