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일기(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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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정말 좋았다. 공동현관 기준으로 좌측 라인이 2베드, 우측 라인이 1베드였다. 석박사 전용이라 학부생은 입주할 자격이 없었다. 2베드는 가족 전용, 1베드는 아이가 없는 신혼부부 또는 싱글 전용이었다. 1베드에 입주할 신혼부부가 없으면 싱글 중에서 장학생에게 입주 우선권이 있었다. 장학생 중에서도 국가 장학생, 취브닝 장학생이 1순위였다. 2베드는 기억 안 나는데 1베드는 월 600파운드였다.
2층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복도가 나오고 복도 끝에 넓은 주방이 보였다. 주방 한가운데 아일랜드 식탁이 있었다. 현관에서 한걸음 들어와 우측 문을 열면 넓은 거실이 나오고, 거실 옆문을 열면 더블룸 크기의 침실이 있었다. 더블 침대와 공부할 책상, 그 밖에도 풀옵션으로 필요한 건 다 있었다. 침실 옆이 욕조가 함께 있는 화장실이었는데, 아주 넓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이 건물에는 전용 주차장이 있었다. 집 앞 공도에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도 있어서 너무 맘에 들었다.
이 건물을 런던대가 통째로 리스해서 저렴하게 주는 것이었다. 정상가는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8~900파운드 정도 하지 않았을까? 취브닝 사무국으로부터 허락만 받으면 된다. 허락을 해주든 말든 집이 너무 맘에 들어서 일단 계약금을 걸어버렸다. 나야 어차피 장학생으로 학비 한 푼도 안 내는데 월 600파운드 정도는 나쁘지 않았다. 10개월 살아봤자 6,000파운드인데 그 정도는 아무 문제 없었다. 그 당시 학비는 10,600파운드였나? 이것저것 뭐 갖다 붙이니까 11,500파운드 정도 했던 것 같다.
집 앞에 세인트 판크라스 교회가 있었다. 영국에서 오래된 교회 중 하나였다. 1800년대에 새로 지은 교회인데, 314년에 지어진 구 교회가 길 건너 소머즈 타운에 있다. 교회 벤치에 앉아 취브닝 사무국에 전화해 숙소 지원을 문의했다. 기숙사 안 들어가고 플랏을 원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데 말이 길어지는 것이 싫었다. 기숙사 공용 주방, 냉장고나 식기를 남들과 공유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간단하게 답했다. 지원 범위를 초과하는 부분은 내가 부담하겠다고 말했는데도 굳이 상의해 보고 연락준단다. 일단 기다렸다.
집 근처를 둘러봤다. 유스턴역과 세인트판크라스역 사이에 세계 최대 규모라고 불리는 대영도서관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대영도서관은 정신 산만해서 싫어했다. DVD 빌리러 갈 때만 이용했고, 공부할 때는 집 근처 대학 도서관을 이용했다. 길 건너 유스턴역 옆은 소머즈 타운인데 이곳은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가 공존하는 동네였다. 주말에는 다양한 인종과 종교행사가 열리는데 다툼은 없었다. 그 동네에 유난히 댄스 동호회가 많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라틴 댄스 동호회가 굉장히 많았다. 소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운영되는 무료 댄스 강좌도 있어서 가끔 심심할 때 방문하곤 했다.
집 앞에 UCL이 있는데, 다른건 몰라도 그 학교 체육관은 영국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최고의 운동 시설과 수영장을 가지고 있는데, 런던대 소속이면 할인을 많이 받아서 월 7파운드 정도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학교 도서관은 런던대 중앙 도서관을 자주 이용했다. LSE 도서관이 신축 공사 중이었다. 01년 11월에 개관했는데 그때까진 런던대 중앙 도서관을 이용했다. 런던대 소속의 모든 도서관을 이용하려면 별도의 도서관 카드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같은 런던대 소속이라 할지라도 타 학교 도서관 이용 시 학부생은 열람만 가능하고 대출이 불가능했다. 석박사는 대출도 가능했다.
집 근처에 자주 갔던 기숙사가 있었다. Commonwealth Hall인데, 그 당시 영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기숙사였다. 영연방 학생들만 입주하는 기숙사로 오해했는데, 런던대 소속이면 누구나 입주가 가능했다. 이 기숙사의 장점은 식사였다. 싱글룸이 주당 70파운드였는데, 하루 세끼를 제공하는 Full Board 기숙사였다. 식사 비용이 25파운드였는데, 방값을 포함하면 주 95파운드였다. 가장 좋은 방을 선택해도 식사 포함 주 130파운드였다.
식비가 저렴하다고 싸구려 음식이 나오지는 않았다. 내가 알기로 그 기숙사는 정부 지원을 받는 기숙사였는데, 음식이 잘 나왔다. 입주자 외에, 런던대 소속 학생은 학생증 가져가서 돈 내고 먹었는데 메뉴에 따라 가격이 달랐지만 보통 2파운드 정도 했다.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지만, 일반인은 할인이 없었다. 6~8파운드 정도 했을 것이다. 그 당시 이 기숙사에 대한 평점은, 다른 건 몰라도 음식은 항상 만점에 가까웠다.
학생들이 운영하는 펍도 있었는데, 넓고 아늑해서 나도 자주 이용했다. 가격도 학생들 주머니 사정에 맞춰주니 저렴해서 좋았다. 그곳에서 지역 소셜 프로그램과 연합 학교의 동아리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스카이다이빙 클럽에 가입했다. 클럽 활동을 하면서 타 학교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재밌었다. 기숙사 앞에 테니스 코트가 지금도 있는데, 그곳에서 테니스도 자주 쳤다. 지금은 기숙사가 철거되고 새로 지으면서 많은 것들이 사라졌지만, 테니스 코트는 살려놨다. 새로 지은 기숙사 이름이 Garden Halls이다.
그 기숙사 뒤로 플랏이 엄청 많은데, 대부분 런던대가 리스한 플랏이었다. 런던대 연합 교직원, 석박사가 우선 입주하고, 남는 플랏은 학부생에게 렌트해 주었는데 월세가 5~600파운드로 쉐어하면 부담 없는 가격이었다. 그곳에 농구 코트가 하나 있었는데, 내가 농구를 너무 좋아해서 자주 갔다. 이스트본에 있을 때, 공원에 있는 농구 코트에서 사람들이 오기를 한참 동안 기다렸던 적이 있다. 영국인들은 농구를 잘 안 하는 모양이다. 주로 미국이나 캐나다, 스페인에서 온 학생들과 놀았다.
기다리는 동안 학교까지 걸었다. 어차피 계약서 써야 해서 학교에 가야 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재밌다. 생각도 못 했던 곳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다. 학교 가는 길에 낯익은 얼굴이 보이길래 누군가 했더니 이스트본에서 봤던 친구다. 그 친구도 날 보고 잠깐 놀라더니 이내 짧게 묵례하고 지나쳤다. 이스트본에서 같은 어학원에 다녔던 친군데, 여친과 함께 왔다가 여친이 다른 남자와 눈맞은 사건의 피해(?) 남학생이었다. 고개를 들어 그 학생이 나온 건물을 보니 그 학교 런던 본교였다. 인연까지 들먹일 만한 일은 아닌데 그냥 웃음이 나왔다.
걸음이 빠른 편인데도 15분~18분 정도 걸렸다. 입주하면 학교 다닐 때 버스 타고 다녀야 할 것 같다. 학교에 도착했을 즈음 전화가 왔다. 월세 전액 지원해준다고 공부 열심히 하란다. 땡큐를 연발하고 끊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동생 놈한테 전화해서 저녁 사주기로 했다. 01년 9월 1일부터 02년 8월 31일까지 계약했다. 9월 한 달은 자비로 체류하고, 10월부터는 장학금이 매월 지급된다. 뉴몰든에 2주간 머물 돈을 미리 지불해서 1주일 더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남은 1주일이 나에겐 악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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