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으로 시작하는 위스키 이름이 많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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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몰트 스카치위스키 이름 앞에는 유난히 ‘글렌(Glen)’이 자주 붙는다. 글렌리벳(Glenlivet), 글렌피딕(Glenfiddich), 글렌그란트(GlenGrant), 글렌모렌지(Glenmorangie). ‘글렌’은 스코틀랜드의 토속어인 게일어로 ‘골짜기’를 뜻한다. 이 짧은 단어에는 위스키가 살아남은 방식과 그 역사가 담겨 있다.
18세기 후반 스코틀랜드에서는 밀주가 급증했다. 세금 때문이었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병된 뒤, 스코틀랜드에 영국 정부의 과세 체계가 적용되면서 위스키에 높은 세금이 부과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 자급자족하던 농민과 소규모 증류업자들은 하루아침에 불법 증류업자가 됐다. 그들이 택한 생존 방식은 ‘숨는 것’이었다. 세금 징수원의 눈을 피해 깊은 골짜기, 외딴 산속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하이랜드 지역이다. 그곳에는 맑은 샘물과 숲,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험한 지형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밤에 불을 켜고 몰래 술을 만들었다.
1823년 영국 정부는 밀주 단속을 완화하고 ‘증류 면허 제도’를 도입했다. 정해진 세금을 내면 합법적으로 위스키를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듬해, 증류소 가운데 처음으로 글렌리벳이 공식 면허를 취득했다. ‘글렌’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합법적인 위스키를 뜻하는 상징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이후 수많은 증류소가 이름에 ‘글렌’을 붙였다. 실제로는 골짜기에 있지 않아도 ‘글렌’만 붙이면 전통 있고 믿을 만한 위스키처럼 보였다. 아예 ‘글렌리벳’이라는 이름을 갖다 쓰는 곳도 많았다. “진짜 글렌리벳은 누구인가”를 두고 법정 다툼이 벌어졌다. ‘원조’ 글렌리벳은 1884년 ‘더 글렌리벳(The Glenlivet)’이라는 이름을 공식 상표로 등록하고, 브랜드 독점권을 인정받았다.
‘글렌’은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보증서처럼 퍼져 나갔지만 이 명칭이 흔해지다 보니 “어떤 글렌이었지?”라며 헷갈리는 소비자들이 생겨났다. 이런 흐름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증류소들은 역으로 ‘글렌’ 없는 이름을 택했다. 아란(Arran), 킬호만(Kilchoman), 딘스턴(Deanston), 오반(Oban) 같은 싱글몰트 브랜드는 짧고 선명한 이름으로 ‘글렌’과 차별화했다.
이제는 ‘글렌’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설명하긴 어렵다. 그렇다고 그 의미가 사라진 건 아니다. 세금을 피해 골짜기로 숨었던 사람들, 밤마다 불을 때며 이어간 위스키의 전통, 그리고 가장 먼저 제도 안으로 들어온 증류소. 이 모든 이야기가 ‘글렌’이라는 단어에 녹아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위스키 이름 앞에 그 단어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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