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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번 8. 내셔널 갤러리와 주말 오후의 트라팔가 스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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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5번진짜안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7건 조회 9,044회 작성일 07-06-0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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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View of Oudewater
about 1867 KOEKKOEK, Willem
1839 - 1895

그림 2 Room 32 in the National Gallery
1886 GABRIELLI, Giuseppe



 어려운 날들을 간신히 견뎌내면 좋은 날들이 닥쳐오기 시작한다는 것은 지구에서 인류로 살아간다는 것의 쏠쏠한 재미인 것 같다.

 커리 전문 레스토랑에서 감자로 살아간다는 것이나 온라인 게임 안에서 NPC로 살아간다는 것에는 그런 유희가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뭐라고 말해도 변명이지만, 지난 수개월 동안 거침없이 되는 일이 없어 하이킥도 못하고 영국을 생각하는 시간보다는 당장 뭘 먹고 살아야 하나를 생각하며 세월을 보냈다. 굶어 죽기 딱 좋은 게 작가라더니 뭐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5월말 무렵, 지끈거리던 원고를 간신히 마감하고 한 천 년은 갈 듯한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그만 급 반전처럼 행복해 져서, 이제야 여기에 글을 쓸 수 있는 손가락이 다시 돋아났다.

 그 동안 04Uk 사이트와 동지들에게 턱없는 언데드라는 생각을 몇 만 번 했다.(대부분의 언데드 종족은 턱이 없다.) 마냥 죄송할 따름이지만, 이제는 정말 열심히 좋은 글을 써서 사죄하겠노라고 다짐(이 믿을 수 없는 다짐ㅡㅡ;;이지만)한다.

 오래간만에 할 얘기는 내셔널 갤러리, 에서 노세요. 라는 얘기다.


 <내셔널갤러리와 주말 오후의 트라팔가 스퀘어>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다면 이미 시인이 아니고 뻥쟁이가 뻥을 안치면 이미 뻥쟁이가 아니라는 건 자명하다. 고로 트라팔가 광장에 사람과 비둘기가 없으면 트라팔가 광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트라팔가 광장에 내셔널 갤러리가 없으면 주말이 Weekend가 아니다. 그러니까 주말에 공짜 갤러리에 가지 않는 사람은 Londoner가 아니다.
라고 나는 혼자 명제를 만든다.

 나는 내셔널 갤러리에 시간을 파묻는 걸 좋아하던 100만 명 중의 한 명이었다. 그리고 거의 매 주말마다 그곳에 가는 것을 이탈리안 안심스테이크만큼 좋아하던 2만 명 중의 한 명이었다. 갤러리에 가지 못하는 것을 우울해 하며 잠이나 자는 800만 명 중의 한 명은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주말이면, 내셔널 갤러리에 가지 못하는 것 때문에 인생을 마냥 치사하게 생각하는 2천 명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라고 나는 혼자 통계를 냈다.

 나는 내셔낼 갤러리를 좋아했다. 최소한의 문화생활에는 돈이 든다. 영국에서 돈이 남아돌면 못 할 문화생활이 어디 있겠느냐 만 지지리 돈이 없을 때는 공짜 갤러리뿐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공짜라서 좋아했다기 보다는 너무 괜찮아서 좋아했다. 매번 갈 때마다, 새로운 그림을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가 감미롭다. 회화 콜렉션으로는 세계 어떤 미술관에도 안 꿀린다는 포스를 한 번에 다 맛본다는 건 혓바닥 한 개로 애당초 무리고 워낙 2000점 넘게 소장하고 있다는데 한 번에 다 본다는 건 눈깔 2개로 어림없는 일 아닌가.

‘내셔널 갤러리에서 고흐의 해바라기, 마네의 수련연못, 보고 민박집에서 싸 준 샌드위치 까먹고 그 앞 트라팔가 광장에서 사진 찍다.’ 쯤으로 끝나기 일쑤인 관광객들 이라면 일정이 아쉬울 만한 곳이다. 런던에 살며 매 주말 가서 즐겨도 회화 2000점이 몽땅 지겨워 지는 것보다 노화의 진행속도가 빠르다. 잠깐 투어 온 사람의 일정에는 빠듯한 그 아름다움을 가까이 사는 영사 동지들은 행복하게 열심히들 즐기시라.

- 가 오늘 쓰는 얘기의 요지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즐기는 방식은 자유다. 나는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라 관광객들 틈에 끼어서 VINCENT VAN GOGH 형의 Sunflowers를 보다가 갑자기 해바라기 같은 사랑이란 얼마나 힘차게 슬픈가, 라는 감정이 솟아 쥘쥘 짜기도 했고 LEONARDO DA VINCI 아저씨의 Virgin of the Rocks(암굴의 성모)을 락처녀 라고 오역해 놓고 혼자 실실 쪼개기도 했다. 어느 구석에선가 KOEKKOEK, Willem 이란 화가를 발견하고 꽥꽥 윌렘, 하면서 그림 앞에서 오리 춤을 추면서 놀기도 했고 렘브란트 34세, 초상화를 보며 같은 나인데 이 색히 피부가 왜 이렇게 좋고 어려 보여? 하면서 차별 철폐를 위해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 하기도 했다. (보통 자기 초상화엔 뺑끼를 많이 쓴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미술관 규모가 상당한지라 휴식을 취해야 할 때면 나는 트라팔가 광장의 계단에 앉아 비둘기들에게 평화롭게 빵 조각을 던져 주다 비둘기 떼의 역습에 완전히 둘러싸여 당황해 버리는 젊은이들의 쇼개그를 관람하고 계단에서 일어서다 무릎을 감싸 쥐고 간신히 미술관에 입장하는 몸개그를 펼치는 노인들을 구경했다.

 국립 미술관 입장료는 영국이라는 국가가 내고 있어서 나는 낼 필요가 없었다. 나는 오르셰, 루브르 하는 식으로 멋지게 이름 짓지 못하고 내셔널, 브리티쉬 하는 멋대가리 없는 이름 밖에 못 짓는 그 놈의 국가에 비 맞으며 쓰시 배달해서 번 돈의 일부를 꼬박꼬박 세금으로 냈기 때문에 미술관이 공짜라는데 전혀 고마움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돌아와 돈 내고 미술을 보려니 영 비싸다. 유명한 작품을 잔뜩 들여온 기획전이라던가 잘 나가는 작가의 내한 전시회는 또 미친듯이 비싸서 내셔널 갤러리의 공짜 쇼가 얼마나 괜찮은 쇼였는지 새삼 아쉬운 것이다.
런던이 다른 유럽의 예쁘고 멋지고 아름다운 도시들에 비해 매력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 공짜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영국 정부가 캐 가난해져서 돈 내고 보라고 하기 시작한다면 Londoner 20만 명이 다른 도시로 달아나 버릴 지도 모른다.

 주말에 빨래도 해야 하고, 밀린 과제도 해야 하고 간만에 영양보충도 좀 해야 하고 사람들을 만나 술도 좀 마셔야 하고 연인과 키스도 해야 하지만 그런 일은 갤러리에서 다 할 수 있다. 때 묻은 정신을 세탁하고 문화생활의 과제를 충족하며 간만에 마음의 양식을 보충하고 과거의 인물들을 만나 그들의 메시지를 전해 듣고 운이 좋다면 연인과 함께 갤러리에 가 서로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키스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주말 오후의 트라팔가 스퀘어 자체가 거대한 미술 작품의 체위를 하고 있다. 그 곳에는 인류가 있고 비둘기가 있고 역사가 있으며 인간들이 수습하지 못하는 짧은 생명을 갈무리 해 놓은 순간 순간의 광휘가 공기 속을 떠다니고 있는 중이다.

 미술이란 게 도대체가 밥도 안 되고 반찬도 안 되는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술 작품을 보고 있다고 우리 주머니에 돈이 생기지도 않을뿐더러 콩이 된장이 되지도 않고 배추가 김치가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미술이라는 예술 장르가 가진 마력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자리에 있다. 인간이 남기는 것 중에 가장 수명이 긴 것이 예술 작품 아닌가. 몸은 어차피 남지도 않고 뼈다귀는 남겨봐야 뭐 아무 도움도 안 되니까 사람들은 애써 예술 작품을 남긴다.

 그런 예술 작품들을 만난다는 건 지구 위에서 인류로 살아간다는 것의 가장 쏠쏠한 재미다. 커리 전문 레스토랑의 감자로 살아간다면 그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런던에는 내셔널 갤러리가 있고 그 안에는 아름다운 재미들이 2000여 점 걸려있으며 광장에는 2만 여 점이 돌아다니고 있다.

 즐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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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just lovely님의 댓글

just lovely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영국인들의 삶은 런던과 비런던의 차이가 꽤 큰 듯합니다.
뭐 한국도 마찬가지지만....영국의 지방도시에서 살때 미술관 보다는 농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었으니...^^;; 어디서든 자기의 관심분야대로 살기 마련인지라 농장에서 딸기따는 재미가 작품 보며 음미하는 가치보다 우선했습니다..ㅋㅋㅋㅋ
오랜만에 뵙는 글이라 그런지 더 정답네요.
 
 
 
 

인정님의 댓글

인정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우리나라 역시 설과 그외에 지방간의 약간의 갭은 있지만 특히 여기는 런던과 비런던과의 갭의 차이가 조금 많이 나는듯 합니다..!!

jj님의 댓글

jj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글 너무 재밌습니다.. 그리고 많이 공감이되구요...

혼자친한척님의 댓글

혼자친한척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아니 이 노친네 여적 살아있네 라고 할려다가 생각해보니 님의 글을 읽고 친한 느낌은 저만의 착각이었구나 합니다. 살아계시니 다행이긴한데 글이 좀 무뎌진 느낌입니다. 사랑해서 그런가....암튼 배부른 작가의 글은 재미없어요. 어떻게 좀 해봐요. 네?

썸머님의 댓글

썸머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15번아저씨 ㅎㅎ 아 궁금했었다..진짜.. 살아계셨군여...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셨다구요? 영국을 등한시한 핑계치고는 조금 이프로 부족하군여... 영사에는 안오실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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