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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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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Dave0723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0.♡.64.141) 댓글 1건 조회 73회 작성일 26-01-29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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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방을 보러 다녔다. 학생들이 많이 사는 집은 보통 싱크대가 더러웠다. 화장실도 청소를 안 하니 더러웠다. 편견일 수도 있지만, 중국 학생들이 많이 사는 집은 냄새부터 남달랐다. 좋은 집을 발견했는데 내가 문 열고 들어서니 집주인이 신경질적으로 “No more Korean!!!”을 외쳤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 집에 살고 있던 한국인 학생에게 전기세를 내라고 말했는데 이 학생이 전기세가 그렇게 많이 나왔냐면서 고지서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게 왜 화날 일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 집은 전기세 불포함이라 세입자들끼리 전기세를 나눠내는데 고지서를 보여주고 나누는 것이 맞다. 집은 좋은데 집주인 성격을 보니 들어가면 피곤할 것 같았다.

 

100% 맘에 드는 방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방을 찾아다녔다. 그래서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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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본 관광 명소 비치 헤드,Beachy Head>

영국 와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힐링은커녕 스트레스만 받고 있다.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어보려 관광지를 찾아 나섰다. 이스트본에서 유명한 비치 헤드에(Beachy Head) 올라갔다.

 

절벽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제법 좋았다. 날씨가 맑을 땐 프랑스가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한편으론 자살 명소이기도 했다. 자살을 만류하기 위한 문구들이 여기저기 많이 있었다. 어느 성경 구절이 눈에 들어오길래 읽어봤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읽다 말았다.


방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플랏 구하러 다녔다.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스튜디오 플랏은 그냥 한국식 원룸이었다. 공간의 구분이 없어서 굳이 구분하려면 커튼으로 공간을 나눠야 했다. 스튜디오는 제외하고 제대로 된 플랏을 구하려 부동산을 돌았다. 가구가 전혀 없는 플랏과, 백색가전만 있는 플랏, 한국식 풀옵션 등으로 구분됐다.

 

6개월 뒤 런던 기숙사로 들어가야 하는데 가구를 살 수는 없었다. 부동산에 풀옵션만 원한다고 말했는데 가구가 없어도 집주인과 이야기하면 가구를 넣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 믿고 여러 곳을 돌았는데 소득 없이 피곤하기만 했다. 매일 하루 4곳 이상 보러 다녔다. 다리 아프고, 배고프고, 피곤했다. 시간이 갈수록 지쳐만 갔다.

 

학교로 소포가 왔다. 한국에서 친구들이 보내온 것이다. 리셉션 앞에서 사인하고 수령했다. 라면 박스 크기인데 집에 가져가 열어보니 건어물, 과자, 라면, 담배 그리고 200ml 팩소주까지 있었다. 목록통관이라 박스 내 물품들을 모두 기재해야 하는데 담배와 술은 뺐다. 그러다 재수 없게 걸리면 통관이 안 되는데 그런 거에 겁먹으면 세상 살기 힘들다.


골뱅이와 번데기도 있었다. 이 골뱅이 원산지가 아마 영국일 텐데? 웃음이 나왔다. 내가 번데기 안 먹는다는 거 알면서 어떤 놈이 이걸 넣었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누구 소행인지 짐작이 가니까 더 웃겼다. 전화기 붙잡고 쌍욕을 퍼부었다. “너 또 번데기 보내면 죽인다.!!!” 나와 4년 동안 한 이불 덮고 자던 놈이다. 내가 발작하는 모습을 보이면 한없이 행복해했다. 이런 놈이 판사가 됐다. 말세다.

 

바닷가로 나와 자리를 잡고 술을 마셨다. 마른오징어에 함께 들어있는 작은 고추장과 마요네즈를 함께 찍어 먹었다. 고향의 맛이다. 영국 온 지 며칠 안 됐는데 벌써 한국이 그리웠다. 처음부터 영국에 올 생각은 없었다. 원래는 친구들과 함께 미국으로 가려 했다. 친구들이 하버드 가자고 노래를 불렀다. 나도 그쪽으로 많이 기울었었다. 우연히 취브닝 장학금을 발견하고 영국으로 급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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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vening Scholarships, 영국 외무부에서 외국인 대상으로 인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을 양성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었다. 실제로 타인과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뽑았다. 이상하지 않은가? 남에게 봉사할 사람은 영국에도 많은데 왜 굳이 외국에서 뽑을까? 실상은 국제무대에서 영국을 지지해줄 인재 양성에 있었다. 그렇게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장학금이었다.

 

장학금 신청하려면 자원봉사나 직장 경력 2년이 필요했다. 나에게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군대에서 월급 1만원 받고 복무했는데 자원봉사로 인정 안 해줄까 궁금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한번 찔러봤는데 직장 경력으로 인정해줬다. 확실치는 않지만, 당시에 내가 가진 이력이 좀 독특했는데 그래서 경력을 무시(?)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도 경력으로 인정은 해주는 것 같은데 25년이 흐르는 동안 예산이 대폭 삭감되어 경쟁이 심화됐다. 그걸 경력이라고 제출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라떼는 학교 성적 평점 3.5로 선발된 사람도 있었다. 01년 한국에서 선발한 인원은 85명으로 역대 최다 인원이었다.

 

영국에 괜히 왔다고 후회했다. 장학금 말고는 영국이 크게 매리트 있어 보이지 않았다. 국비 유학 신청이 5월부터인데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고민했다. 포기하고 돌아가면 번데기가 굉장히 행복해할 것 같았다. 죽을 때까지 그놈한테 조롱받을 것을 생각하니 욕이 섞인 한숨이 나왔다.

 

저녁 식사로 돼지고기 스테이크가 나왔다. 두툼하게 썰어 놓은 그것은 한눈에 봐도 맛없어 보였다. 고기의 절반 가까이가 비계였는데 살코기와 섞이지 않은 비계였다. 그 부분만 잘라내고 먹으면 되는데 또 미련하게 음식 안 남기겠다고 다 먹었다. 속이 니글거렸다. 음식도 문화의 일부다. 내가 영국에 맞춰야지 영국이 나에게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음식 때문에 적응을 못 한다면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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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영업 중이다. 내부 색상은 원래 녹색과 흰색이었다.>
 

괴로움에 밤거리를 방황하다 어디선가 익숙한 음식 냄새를 맡았다. 후각에 의지해 걷다 보니 중식당이 나왔다. ‘Chopsticks’ 무작정 들어갔다.


토모야가 창가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어쩐지 저녁 먹을 때만 사라지더라...생존법을 일찍 터득한 놈이었다. “Can I have...” 메뉴 고르지도 않았는데 말부터 나가는 것을 보면 역시 난 토종 한국인이었다. “chicken fried rice with black bean sauce and... sweet & sour chicken, please?“

 

포장 전문점이지만 창가에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바가 있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쌀밥인가? 정말 맛있었다. 중국식 짜장 소스는 처음 먹어보는데 한국식과 완전히 달랐다. 치킨 탕수육 소스는 한국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볶음밥은 2.5파운드, 탕수육도 2.5파운드였다. 콜라 뚱캔 50펜스를 합쳐서 5.5파운드였다.

 

이제 곧 하숙집에서 나와야 하는데 아직 집을 못 구해 걱정이 컸다. 무엇이 문제인지 노트에 끄적여 보았다. 나도 모르게 한국과 물가를 비교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국과 비교하면 여기서 못 산다. 1파운드 환율이 2200원 전후였다. 인터넷에는 2천원이었다고 나오지만 실제로 그런 적은 없었다. 04년에 영국에 출장을 왔는데, 그때는 2400원까지 튀었던 적도 있다. 그냥 계산하기 편하게 1파운드 2천원으로 잡고 계산했다.

 

원룸이 가장 많은 봉천 신림에서 월세가 30만원 이하였다. 가장 비싸다는 종로와 강남 오피스텔은 50~60만원이었다. 그 주변 일대가 비슷했다. 신사동이 조금 저렴했는데 40~45만원이었다. 여의도를 가도 강남과 비슷했는데 이 촌동네에서 300파운드가 넘으면 낭비라는 심리적 거부감이 상당했다. 한국과 비교할 거면 그냥 노숙해야 했다.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돈은 낭비하더라도 시간은 낭비하지 말자. 돈은 언제든 다시 벌 수 있지만,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의미 없이 낭비하는 시간이 돈보다 더 아깝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1파운드를 1천원으로 계산했다. 그게 편했다. 300파운드면 30만원이다. 이 촌동네는 딱 봉천동 수준이다. 그렇게 바라보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몰라 이제... 그냥 돈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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